알렉산드리아의도서관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정복 이후에, 그리스 문화는 동양의 문화와 결합되어 소위 헬레니즘 문화를 낳았다. “헬렌”이라 함은 그리스를 뜻한다. 이집트의 지중해 연안 도시인 알렉산드리아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기원전 332년에 고대 세계의 중심으로 세운 도시로서, 그리스인, 이집트인, 히브루인 등 여러 민족들이 모여 살았다.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그곳을 수도로 하여 새 왕국을 세웠는데, 이 왕조는 클레오파트라 여왕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은, 서울 알렉산드리아에 여러 가지 문화를 도입하고 각지의 학자를 초빙하여, 그곳을 학문과 문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이리하여, 이집트에서 태어나 그리스로 건너가서 육성되었던 문화는 다시 이집트로 돌아와 번영하게 된다.
프톨레마이오스는 기원전 288년에 알렉산드리아에 오늘날의 대학과 같은 ‘뮤즘(Museum)’이라는 큰 학원을 세워, 학자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연구하는 곳으로 만들었으며, 여기에는 한때 75만 종 이상의 파피루스 또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수용하는 도서관이 있었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지중해를 지나가는 배들을 불러들여 가진 자료를 모두 필사한 뒤 사본을 주고 원본을 도서관에 보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알렉산드리아는 수학과 과학을 비롯한 문화와 교역의 세계적 중심이 되었다.
그동안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하고, 지중해 연안을 공략하기 시작하였는데, 기원전 48년에 카이사르는 왕조 말기의 클레오파트라와 그 동생 사이의 내분을 틈타 이집트를 장악하려 하였다. 로마군은 항구에 머물던 이집트 함대를 화공으로 격멸하려 하였는데, 항구의 불이 도서관에 옮겨 붙어, 2세기 반에 걸쳐 수집된 많은 문헌들이 소실되었다. 3세기경 로마군이 알렉산드리아에 수차례 침입하여, 학원과 도서관이 있던 궁전을 불태움으로써 도서관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동안 이 도서관에서 연구한 저명한 학자로는 지동설을 주장한 아리스타르코스, 천문학의 아버지 히파르코스, 도서관장이며 지구의 둘레를 계산한 에라토스테네스, 기하학의 체계를 세운 유클리드,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였던 아르키메데스, 도서관학의 아버지 칼리마코스 등이 있다. 히브루어로 되어 있던 구약성경이 그리스어로 번역된 곳도 이곳이다.
그 뒤 학원은 로마인의 간섭과 지배로 알렉산드리아의 문화와 함께 쇠퇴하게 된다. 로마 제국 후기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392년에 기독교 이외의 종교를 금지하게 되자, 다른 종교의 사원들이 파괴되었다. 기독교들은 알렉산드리아의 세라피스 사원을 파괴하였고, 거기에 있던 많은 양의 양피지에 씌어진 그리스 저작들을 지워서 성경을 기록하는 데 사용하였다.
640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학원이 파괴됨으로써 알렉산드리아 문화는 끝이 났다. 이슬람교도들은, 코란의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은 책이면 읽을 필요가 없으며, 코란에 반대되는 내용이 들어 있는 책은 읽어서는 안 된다는 이유로 하여, 알렉산드리아의 목욕탕들이 6개월 동안 양피지 두루마리들을 연료로 사용하게 하였다. 학원은 파괴되고 학자들은 흩어졌지만, 그래도 그리스 문화는 살아남아서 뒤에 서유럽 문명 형성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와 같이 기원전 300년경에서 기원후 600년대까지를 알렉산드리아 시대라 부른다.
당시의 헬레니즘 문화가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을 통하여 인류 문화에 공헌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1971년에 그 도서관을 재건하기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이집트 정부는 UNESCO를 통한 각국의 원조를 받아 1993년에 착공하였으나, 그 부지의 유물 발굴 때문에 2년간 중단되었다가, 1995년에 재착공되어 7년 만인 2002년 10월에 완공되었다. 이리하여 다시 태어난 BA, Bibliotheca Alexandria는 자료수로나 규모로나 다시 세계 최대의 도서관이 될 것이라 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알렉산드리아의 도서관 (수학의 세계, 2006. 9. 10.,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